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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솔, 피살, 김정은, 김정남, 피살 김정남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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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41세의 한국계 미국인 남성이 있다. 로스앤젤레스(LA)에서 태어났고, 미국 해병대 부사관으로 이라크에서 1년 동안 복무했다. 버지니아대학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MBA)를 딴 뒤 컨설팅 업체를 직접 운영하기도 했다. 부인은 역시 한국계로 고등학교 교사다. 미국에서 안정적으로 살 조건을 두루 갖춘 사람이다.

 


© Copyright@국민일보 김한솔의 아버지이자 피살된 김정남의 2001년 5월 모습(왼쪽).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1월 5일 평양에서 열린 노동당 제8차 대회에 참석했던 모습(오른쪽). AP뉴시스
그의 이름은 크리스토퍼 안.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사건이 2019년 2월 22일 발생했다. 빈손으로 끝난 베트남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이 열리기 닷새 전이었다.

‘자유조선’ 회원 10명은 그날, 스페인 마드리드 주재 북한대사관에 진입했다. 크리스토퍼 안도 그중 한 명이었다. 자유조선은 북한 정권에 대항하면서 북한 주민들을 위해 그동안 베일에 가려진 채 활동해온 단체다.
이번 경우도 그랬다. 자유조선은 “북한 외교관이 북한에 있는 가족들의 안전을 우려해 납치극을 가장한 탈출을 부탁했다”고 주장했다. 북한대사관에서 벌어진 폭력적인 행동들은 납치로 꾸미기 위한 연극이었다는 것이다. 자유조선은 “그러나 북한 당국이 탈북 계획을 눈치챘다고 우려한 북한 외교관이 마음을 바꾸면서 작전은 물거품이 됐다”고 강조하는 상황이다.
© Copyright@국민일보 자유조선은 김한솔이 자신의 구출을 도왔던 에이드리언 홍 창과 크리스토퍼 안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동영상을 2019년 5월 29일 유튜브를 통해 공개했다. 이 동영상은 크리스토퍼 안이 타이페이 공항에서 김한솔과 함께 있었던 2017년 2월 15∼16일 촬영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유튜브 캡처
이후 자유조선 회원들은 스페인을 떠나 곳곳으로 흩어졌다. 북한대사관은 스페인 수사당국에 이 사건을 신고했다. 스페인 사법당국은 자유조선이 북한대사관 직원들을 감금하고, 컴퓨터 등을 들고 나왔다는 이유로 이들의 송환을 요구하고 있다.

© Copyright@국민일보 김한솔의 아버지 김정남이 2017년 2월 13일 북한의 사주를 받은 화학무기 공격으로 숨졌다는 사실이 알려진 같은 달 14일 서울역의 TV에서 뉴스 속보가 방영되고 있다. AP뉴시스
이를 위해 스페인 법원은 자유조선 회원들을 겨냥해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전체 숫자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공개적으로 수사선상에 오른 인물은 크리스토퍼 안과 역시 한국계이면서 자유조선의 리더인 에이드리언 홍 창, 두 사람뿐이다. 에이드리언 홍 창은 미국 수사당국의 수배를 피해 지금 숨어 지내고 있다.
이 사건으로 체포돼 재판을 받고 있는 사람은 딱 한 명, 크리스토퍼 안뿐이다. 그는 2019년 4월 18일 미국 연방수사국(FBI)에 붙잡혔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16일 보석으로 풀려났다. 정확히 90일 동안 구치소에 있었다.
그는 현재 완화된 가택구금 상태에 있다. 오전 8시부터 오후 8시까지만 밖에 나갈 수 있고, 전자발찌를 착용하고 있으며, 집으로부터 15마일(24㎞)을 벗어날 수 없고, 자유조선 회원들과는 어떠한 접촉도 할 수 없다.
미국이 스페인과 맺은 범죄인 인도청구조약에 따라 그의 스페인 송환 여부를 결정할 재판은 계속되고 있다. 그의 변호사는 “크리스토퍼 안이 재판에서 패해 스페인으로 송환될 경우 그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다”고 우려했다.
© Copyright@국민일보 자유조선에서 활동했던 크리스토퍼 안이 지난 20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 국민일보와 단독 인터뷰를 마친 이후 LA 시내에서 사진 촬영에 응했다.

변호사는 말을 아꼈지만, 크리스토퍼 안이 스페인으로 넘겨질 경우 북한의 납치 또는 암살 가능성을 우려하는 것으로 보였다. 1심 재판 결과는, 이르면 최종 심리가 열리는 5월 25일 나올 전망이다.
스페인 북한대사관 진입이라는 기상천외한 사건이 터지면서 자유조선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났다. 그리고 그들이 비밀스럽게 진행했던 활동의 일부분도 동시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국민일보, 한국 언론 최초로 크리스토퍼 안 인터뷰

국민일보는 지난 20일(현지시간) 미국 LA에서 크리스토퍼 안과 7시간 동안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번 인터뷰는 그가 보석으로 풀려난 이후부터 추진됐다. 1년 반이 넘는 시간에 걸쳐 미국 내 북한인권 단체 관계자들과 미국인 북한 전문가들, 그리고 크리스토퍼 주변 인사들을 접촉한 끝에 성사됐다. 그 수는 20명이 넘는다.
크리스토퍼 안이 한국 언론과 만난 것은 처음이다. 모습을 드러내고 대면 인터뷰에 나선 것도 해외 언론을 통틀어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국민일보에 자유조선에서 했던 활동과 현재 재판 상황, 한국계 미국인으로서의 심경 등을 털어놨다. 국민일보는 크리스토퍼 안과의 인터뷰 내용을 5회에 걸쳐 보도할 계획이다.
크리스토퍼 안은 유창하지는 않으나 의사소통은 충분히 가능한 한국어를 구사했다. 인터뷰는 한국어와 영어를 병행해 진행됐다. 그의 변호인단 3명 중 한 명이 인터뷰 처음부터 끝까지 배석했다.
크리스토퍼 안은 알려지지 않은 자유조선의 여러 활동에 관여해왔다. 인터뷰의 중요한 대목 중 하나는 그가 북한 김한솔 구출 작전에 나섰던 이야기였다.
김한솔의 아버지는 북한 지도자였던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이다. 그러니까 김한솔은 김정일의 맏손자이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조카다. 김정남은 이복동생 김정은 위원장에게 북한 권력을 뺏긴 ‘비운의 황태자’였다.
김한솔, 아버지 김정남 피살 직후 자유조선에 도움 요청

김정남은 2017년 2월 13일 말레이시아 공항에서 북한의 사주로 이뤄진 화학무기인 VX 신경작용제 공격을 받고 숨졌다. 당시 마카오에 거주하고 있던 김한솔은 아버지가 목숨을 잃자 신변의 위험을 느꼈다. 김한솔은 도움을 요청했다.
그 대상이 자유조선의 리더 에이드리언 홍 창이었다. 에이드리언 홍이 미국 시사주간지 뉴요커에 밝힌 내용에 따르면, 김한솔과 에이드리언 홍은 두 사람을 모두 잘 아는 사람의 소개로 2013년 프랑스 파리에서 처음 만났다. 두 사람은 이후 연락을 이어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크리스토퍼 안은 에이드리언 홍의 갑작스러운 연락을 받고 김한솔 구출 작전에 뛰어들었다. 이 과정에서 돌연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끼어들었다. 김한솔은 현재 CIA의 보호 아래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첩보 영화 같은 이야기지만 크리스토퍼 안이 김한솔을 헌신적으로 도운 데에는 개인사도 작용했다.
크리스토퍼 안은 인터뷰에서 김한솔 구출 작전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얘기를 했다.

-어떻게 김한솔 구출 작전에 뛰어들게 됐나.
“나는 그때 필리핀 마닐라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김정남 암살 다음 날인) 2월 14일 오후 9시쯤 에이드리언 홍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내가 ‘마닐라에 있다’고 답하니까, 에이드리언이 너무 기뻐했다. 에이드리언은 ‘방금 (김정남의 아들인) 김한솔로부터 연락을 받았다’면서 ‘지금 당장 타이페이 공항으로 가서 그를 도울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그러겠다’고 답했다.”
크리스토퍼 안이 김한솔 구출 작전에 나선 것은 어쩌면 우연에서 시작됐다. 당시, 김한솔 가족은 마카오에 거주하고 있었고, 자유조선의 근거지는 미국이었다. 자유조선 회원들이 마카오나 타이페이로 가기 위해선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마닐라에서 타이페이까지 가는 데는 비행기를 타고 2시간이면 됐다. 크리스토퍼 안은 운명적인 장소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했나.
“곧장 짐을 싸고 마닐라 공항으로 가서 타이페이로 향했다. (다음 날인) 2월 15일 새벽에 타이페이 공항에 도착했다.”
-타이페이 공항에서 김한솔 가족을 어떻게 만났나.
“에이드리언과 상의한 것이 있었다. 나는 검은색 티셔츠와 메이저리그 LA다저스팀의 모자를 쓰고 있었다.(LA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는 LA다저스의 팬이다) 내 복장을 에이드리언이 김한솔에게 알려줬다. 그리고 암호가 있었다. 김한솔이 나를 찾아 ‘스티브’라고 부르면, 그때부터 도움을 주기로 했다.”
-김한솔 가족이 당신을 잘 찾았나.
“그들은 2월 15일 이른 아침에 타이페이 공항에 나타났다. 김한솔은 나를 알아보고 암호대로 ‘스티브’라고 불렀다. 김한솔과 그의 어머니, 10대 후반의 여동생, 그렇게 3명이었다.”
-만나서 어떻게 했나.
“그때는 김한솔 가족의 행선지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도 정해지지 않았다. 나는 김한솔과 주로 대화했다. 일부러 민감한 얘기는 나누지 않았다. 김한솔과는 영어로 대화했는데, 그의 영어 실력은 매우 뛰어났다. 나는 그가 어떤 상황에 빠져있는지를 잘 알았기 때문에 그의 두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미국 바베큐 등 가벼운 이야기를 했다.
-김한솔의 어머니와 여동생과도 대화를 나눴나.
“많은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으나 조금은 대화를 했다. 내가 중간중간에 ‘괜찮은지, 필요한 건 없는지’ 여러 번 물어봤다. 어머니는 걱정 많은 표정으로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내게 자주 물어봤다. 여동생에게는 아이패드를 줘서 넷플릭스를 볼 수 있게 해줬다. 어머니와는 한국어로, 여동생과는 영어로 각각 대화했다.”
김한솔 “‘북한이 널 죽이려 한다’ 전화 받았다”

-김한솔이 당신과 함께 있을 때 김정은 위원장을 언급했나.
“정치 이야기는 가급적 하지 않았다. 김한솔은 김정은을 거론하지 않았다.”
-김한솔이 당시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고 보였는가.
“내가 받았던 가장 큰 느낌은 그가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최대한 정상적으로 보이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는 것이다. 나는 그의 두려움을 떨쳐 내기 위해 가벼운 얘기를 던졌다. 김한솔이 내게 ‘미국에서 사는 것은 어떠냐’고 물어봤던 것이 기억난다. 그래서 미국 음식부터 내가 여행 다닌 얘기를 해줬다. 그랬더니 김한솔이 ‘나도 미국에 한번 가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미국에 가고 싶다는 것이 망명이나 정치적 의미가 담긴 말로 들리던가.
“아니다. 그저 호기심에, 여행 삼아 가고 싶다는 의미로 들렸다.”
-또 다른 얘기는 없었나.
“김한솔과 편한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내가 ‘북한에 있을 때 기억나는 일은 없느냐’고 질문을 던졌다. 그랬더니, 김한솔이 ‘할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밖으로 자주 나가셨다. 할아버지와 낚시를 갔던 일이 기억난다’고 말했다. 나는 그 대답이 끝난 뒤에야 속으로 ‘그 할아버지가 바로 김정일이었구나’ 했다. 낚시 얘기 말고는 더 없었다.”
-그래도 김한솔이 두려움을 완전히 떨치지는 못했을 것 같은데.
“김한솔은 ‘북한이 너(김한솔)를 죽이려고 한다’는 전화를 받았다고 내게 털어놨다. 나는 그 말을 들었을 때 그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 전화가 누구로부터 온 것이었나.
“묻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과 가족의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김한솔이 거주하고 있던 마카오를 가족과 함께 급히 떠나기로 결심하게 된 결정적 원인은 의문의, 이 전화 한통 때문으로 분석된다.
이와 관련해 워싱턴의 한반도 전문가는 “누군가 김한솔에게 북한 정권의 움직임을 알려준 사람이 있다면, 김한솔 가족을 몰래 돕는 북한 내부 조력자이거나, 김한솔의 신변을 꾸준히 주시하고 있던 외국 정보기관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전문가는 이어 “외국 정보기관이나 정부가 개입했다면, 미국이었을 가능성도 있고, 김한솔 신변에 이상이 생길 경우 북한 내부에 혼란이 생길 것을 우려한 중국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김한솔이 "마카오에서 경호하던 경찰이 사라졌다"고 말했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는데.
"나도 언론 보도를 통해 처음 들었다. 당시는 그런 얘기가 없었다."
김한솔, 어머니에게 “가족 위해 제일 옳은 결정” 설득
-김한솔 어머니는 어떤 모습이었나.
“초조해 보였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아들을 믿고 따라 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집에서 어머니·외할머니와 한국어로 말하기 때문에 한국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 그래도 김한솔이 가족과 하는 대화를 일부러 듣지 않으려고 했다. 다만, 어머니가 걱정을 털어놓으니까 김한솔이 ‘이것이 우리 가족을 위해 제일 옳은 결정”이라면서 어머니를 설득하고 안심시키던 장면이 떠오른다.”
-에이드리언으로부터는 어떤 연락이 왔는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스키폴 공항으로 가는 비행기 표를 끊으라는 연락이 왔다. 그래서 내 카드로 김한솔 가족 3명의 비행기 표를 샀다. 김정남이 암살당한 다음날이어서 김한솔 카드로 비행기 표를 사면 여러 나라 정보기관들이 이를 파악할 것이라고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탑승구에서 비행기를 타기 위해 김한솔 가족이 여권을 꺼냈을 때, 항공사 직원이 ‘이 사람들은 탑승이 안 된다’고 막았다. 내가 항의했지만, 그들은 ‘탑승이 안 된다’고 막무가내로 가로막았다.
우리는 다시 공항 라운지로 나왔다. 몇 시간 뒤 CIA 요원이라고 신분을 밝힌 2명이 등장했다. 한 명은 ‘웨스(Wes)’라고 자신을 소개한 한국계 미국인이었고, 다른 한 명은 백인이었다.”
이에 대해 미국을 포함한 각국의 정보기관들이 당시 김한솔의 항공기 탑승을 막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제기됐다. 이때까지 김한솔의 위치를 몰랐던 CIA가 탑승 금지 소동을 통해 그제야 그가 어디 있는지를 파악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러나 외국 정부의 개입보다는 공항 관계자의 자체적인 판단으로 김한솔 가족의 탑승을 막았을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

CIA 요원, 김한솔에 “어디로 가고 싶은가”…사라진 김한솔
-그 CIA 요원들이 김한솔에게 무엇이라고 말했는가.
“나는 김한솔에게 ‘내 생각에는 굳이 이 사람들하고 대화를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말했다. CIA 요원들은 김한솔에게 딱 두 가지를 말했다. ‘어디로 가고 싶은가’, ‘우리는 당신 가족의 안전이 가장 중요하다’ 이것이었다.
CIA 요원들은 내가 이라크전쟁에서 숨진 전우를 추모하는 팔찌를 착용하고 있는 것을 봤다. 나는 그들에게 ‘나는 미국을 사랑하며, 여기서 어떤 불법적인 일도 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그들은 그렇게 2월 15일 하루를 타이페이 공항에서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이 밝았다.
-2월 16일 상황을 말해달라.
“상황이 갑자기 바뀌었다. 16일 아침 항공사 직원이 우리를 찾아와 ‘스키폴 공항으로 가는 것을 돕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내가 표를 새로 끊었다. 그러고는 김한솔과 가족이 비행기에 탑승했다.
정확한 시간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김한솔을 만나고 그의 가족이 비행기를 탈 때까지 대략 36시간 동안 타이페이 공항에서 같이 있었던 것 같다.”
-그 뒤 상황은.
“내가 비행기를 타지 않아 구체적인 상황은 모른다.”
CIA 요원은 김한솔 가족이 탑승한 비행기에 동승한 것으로 알려졌다. 스키폴 공항 입국 게이트에서 자유조선의 회원들과 인권변호사들이 김한솔 가족을 기다렸으나, 그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CIA가 김한솔 가족을 어디론가 데려갔다는 추측만 난무할 뿐이다. 그렇게 김한솔과 그 가족은 사라졌다. 김한솔의 아버지 김정남이 사망한 사흘 뒤였다.
-김한솔과 그 가족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는가.
“나는 전혀 모른다. 나는 그와 그의 가족이 안전하게 지내고 있기를 바랄 뿐이다.”
크리스토퍼 안에게 ‘김한솔을 데려간 CIA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갖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는 답을 내놓지 않았다. 하지만, 자유조선의 리더 에이드리언 홍은 뉴요커와의 인터뷰에서 “김한솔을 잃은 것은 실책이었다”라고 자책했다.
-왜 김한솔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는가.
“나는 아버지를 잃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안다.(그는 7시간의 인터뷰 중 세 번 울먹거렸다. 이 대목이 처음이었다) 우리 아버지는 고등학교 때 미국으로 이민을 와 미국 공군에서 인공위성 기술자로 근무하셨다. 그러다가 인공위성 정비 기업으로 직장을 옮기셨다. 그러고는 내가 세 살 때부터 LA에서 옷가게를 했다. 내가 성장한 이후 아버지가 ‘미국 회사에서는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한계가 보였다. 옷가게는 내가 잘하기만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에 시작했다’고 말씀하셨던 것이 기억난다.
그런 아버지께서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암으로 돌아가셨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나는 고2 때부터 학교를 마치면 어머니와 옷가게 일을 해야 했다. 나는 아버지를 잃은 장남의 책임감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안다.(그에게는 남동생 한 명이 있다)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나타난 김한솔을 보면서 내 17살 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김한솔은 어떻게 보면, 북한의 독재자였던 김정일의 손자다. 그는 나와 매우 다르게 특권적인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때 나에게는 김한솔이 그저 가족의 미래를 홀로 책임져야 하는 젊은 친구로 보였다. 계급이나 빈부, 정치적 상황을 떠나서 말이다. 그래서 김한솔을 만났을 때 ‘나는 너를 이해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김한솔을 둘러싼 상황은 내 경우와 비교도 되지 않았다. 그가 어떤 결정을 하든, 각국 정부는 그를 추적할 것이고, 뉴스가 될 것이었다. 내가 겪었던 상황보다 더 슬프고 어려운 상황이 그의 앞에 있다고 생각했다.”
자유조선은 얼마 뒤 김한솔과 크리스토퍼 안이 타이페이 공항에서 찍은 ‘셀카’를 공개했다. 자유조선은 또 김한솔이 에이드리언 홍과 크리스토퍼 안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40초 분량의 동영상도 올렸다. 이에 대해 일부 외신은 “자유조선이 김한솔을 납치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의도였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크리스토퍼 안은 “단지 이 사건을 기록하고 싶다는 생각에 셀카를 찍었다”고 외신 보도를 부인했다. 그러면서 “김한솔도 셀카를 찍자는 제안에 호의적으로 대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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