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정부 급등한 집값에 대한 피로감, 작년 하반기부터 급격히 오른 금리 때문에 주택 매수 수요가 급감하면서 최근 부동산 시장은 완연한 침체 조짐을 보이고 있다. 한때 ‘로또 당첨’처럼 통하며 수백 대 1의 경쟁률이 예사였던 청약 시장엔 찬바람이 불고, 매물이 없어 못 사던 인기 지역 아파트도 직전 대비 20~30%씩 가격을 낮춘 급매물만 가끔 거래가 이뤄지는 상황이다. 급매물 위주로 거래되다 보니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 일부 단지에서는 실거래 가격이 2년 전 수준으로 내린 사례도 속출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지역별 차이는 있겠지만, 주택 시장이 대세 상승기를 마감하고 본격적인 조정 장세에 진입했다”며 “국내외 경제 상황에 따라 집값 하락이 꽤 오랜 기간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는 전망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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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건설업계에서는 “지금부터가 진검승부”라는 말이 나온다. 지난 2~3년 주택 수요가 넘쳐나던 시기에는 상품의 변별력과 관계없이 아파트가 시장에 나오기만 하면 신축, 기존 주택 관계없이 인기를 끌었지만, 앞으로는 경쟁력을 갖춘 주거 상품만이 소비자의 선택을 받을 전망이다. 혁신을 통해 아파트 브랜드 가치를 꾸준히 높여 온 기업들이 두각을 드러내는 ‘브랜드 춘추전국시대’가 열렸다는 평가다.
◇침체기에 더욱 빛나는 브랜드의 힘
부동산 플랫폼 직방이 올 상반기 자체 애플리케이션 접속자 1143명을 대상으로 설문을 진행한 결과, 전체 응답자의 73%(834명)가 ‘선호하는 아파트 브랜드가 있다’고 답했다. 특히 주거 수요가 많은 서울(71.9%), 경기(76.9%), 인천(76.9%) 등 수도권에서 브랜드 아파트 선호 현상이 두드러졌다.
아파트 브랜드가 집값에 얼마나 영향을 주는지를 묻자 전체 응답자의 87.4%가 ‘영향이 있다’고 답했다. 연령대별로는 30대에서 영향이 있다고 답한 응답자 비율이 90.2%로 가장 높았다. 내 집 마련을 앞둔 젊은 층 실수요자들이 아파트 구매를 선택할 때 브랜드를 특히 중시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실제로 올 상반기 아파트 청약 시장은 대체로 침체했지만, 브랜드 충성도가 높은 대형 건설사 분양 단지들은 비교적 선방하는 모습을 보였다. 부동산 정보 업체 부동산인포에 따르면, 올 상반기 5대 건설사 아파트는 23개 단지에 총 1만3966가구가 공급됐는데, 평균 21.96대1의 청약 경쟁률을 기록했다. 같은 기간 5위권 밖 건설사 평균 경쟁률이 8.65대1에 그친 것과 비교하면 2배 이상 경쟁이 치열했다.
지난 6월 인천 검단신도시에서 분양한 ‘힐스테이트 검단 웰카운티’는 1535가구 모집에 1순위에만 4만6070명이 몰리며 평균 80.1대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지방에서도 삼성물산이 공급한 4043가구 규모 대단지 아파트인 부산 동래구 ‘래미안 포레스티지’가 평균 58.6대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권일 부동산인포 리서치팀장은 “최근 주택 시장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청약 시장에서도 확실함을 좇는 수요자들이 상위 브랜드 아파트에 쏠리는 초양극화 양상을 보이고 있다”며 “주택 시장 침체가 지속할수록 브랜드 아파트 선호 현상은 심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브랜드 아파트 춘추전국시대
국내 주요 건설사들은 주택 시장의 양극화 분위기를 감지하고 브랜드 경쟁력 강화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아무리 시장 상황이 안 좋아도 필수재 중 하나인 주거 공간에 대한 수요가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다. 건설사 입장에선 불황 뒤 찾아올 경기 회복기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최근 시장 상황을 기본의 본질인 경쟁력 강화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하고 있다.
DL이앤씨는 1999년 출시한 하이엔드 브랜드 ‘아크로(ACRO)’를 주요 재건축·재개발 사업 수주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아크로를 처음 출시할 당시에는 주상복합 위주로 적용했지만 2016년 준공한 서울 서초구 반포동 ‘아크로 리버파크’가 한강변을 대표하는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하면서 인지도가 높아지자 주력 브랜드로 활용하는 것이다. 2018년 준공한 서초구 잠원동 ‘아크로 리버뷰’에 이어 신흥 부촌으로 주목받고 있는 성동구 성수동 ‘아크로 서울 포레스트’까지 수요자들의 큰 인기를 얻으면서 DL이앤씨는 고급 주택 분야의 신흥 강자로 떠오르고 있다.
롯데건설도 2019년 처음 선보인 하이엔드 브랜드 ‘르엘(LE-EL)’을 앞세워 강남권 재건축 시장의 신흥 강자로 떠오르고 있다. 서초구 반포우성을 재건축한 ‘르엘 신반포 센트럴’과 강남구 대치2지구를 재건축한 ‘대치 르엘’을 통해 프라이버시를 중시하는 자산가들의 입맛에 맞는 주거 상품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건설업계 맏형인 현대건설과 대우건설 역시 ‘디에이치(THE-H)’ ‘푸르지오 써밋(SUMMIT)’이라는 프리미엄 브랜드를 각각 내놓으며 고급 주택 시장에서 경쟁 우위를 이어가고 있다.
이 밖에도 삼성물산의 ‘래미안’과 GS건설의 ‘자이’, 포스코건설의 ‘더샵’ 등 이미 오랜 기간 소비자들과 소통하며 친숙한 아파트 브랜드도 변화하는 주거 수요에 맞춰 상품을 다변화하고, 기술력을 강화하는 등의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이은형 대한건설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주택 건축 기술이 발달하면서 앞으로 아파트가 소비자 선택을 받으려면 단순히 시공 품질을 넘어 경쟁사와 차별화되는 브랜드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브랜드 경쟁력 강화를 위한 건설업계의 노력이 장기적으로 국민 주거 수준 향상과 삶의 질 개선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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